나는 어릴 때 꿈이 없었다.
아빠가 약대를 가라고 하셨지만 내가 보기에 약사는 그닥 멋진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약을 파는 것과 과일을 파는 것이 다를 것이 없어 보였고 나는 무엇을 파는 일이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약대를 가려면 성적이 월등히 좋아야 했는데 그렇지도 못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공부를 잘하는 축에 들었었는데 말이다.
설상가상이라고 해야할까.... 성적이 조금씩 좋아져도 시원찮을 고등학교 1학년 말쯤 부터 나는 사춘기였던 것 같다.
세상이 마냥 슬퍼서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자살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도 했던 것 같다.
몹시 진지했다.
화목하다고 생각했던 가정이 그닥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고 생각되었고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그닥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삐뚤어져서 일탈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실하게 살아간 것도 아니었다.
우물쭈물한 상태라고 해야 할까?
매일매일 맞이하는 하루가 무한대인 것 처럼 살았다.
한마디로 한심했다.
당시 유일하게 나를 미소짓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면
봄날,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늦은 밤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에서 향기로운 라일락 향기가 바람에 날려 내 코끝에 닿는 것이었다. 너무 그리운 향기다.
곧 라일락이 피는 5월이 되면 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려봐야겠다.
그렇게 고등학생 시절이 지나고
말도 안되는 대학에 강제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엄마가 고3담임샘을 만나서 마음대로 학교와 학과를 정해서 원서를 써오셨다)
나는 재수를 하겠다고 일주일동안이나 단식투쟁을 했는데
극단의 T유형의 기질이 있으신 아빠가 승리했다.
"계집애는 재수는 안돼" 라고 하셨고
재수를 해서 다음에 성공할 만큼 싹이 보이지 않는다고도 하셨다.
입학식날 아는 애들을 많이 만났다.
내가 만난 아이들은 중고등학교때 일명 날라리? 들이었고
학교에서 갖가지 징계를 받은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이 아이들은 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너 여기다녀? 라고 물었다....
나의 입학은 그렇게 가슴 아프게 시작되었다.
아무튼 나는 스스로 치욕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대학에 다니게 되었다.
물론 친한 친구 몇몇도 있었다.
그나마 반가워할 친구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인지라
학과 행사에 한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고
나는 도서관에도 간 적이 없었고
엠티도 축제도 아무것도 참여하지 않았다.
처음엔 같은 과 아이들이 함께 하자고 말을 걸어왔지만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으니 나중엔 부르지도 않았다.
그게 오히려 나는 편했다.
어릴때부터 환상을 갖고 있던 바이올린을 배워보기 위해서
실내악단이라는 동아리에 가입했으나
바이올린 연주에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열심히 참여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는 것이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오로지 학점을 B0이상을 유지하는 것만이 내 대학생활의 전부였다.
그 정도의 대학생활이 아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면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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