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는 철저히 이방인처럼 대학생활을 보냈다.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면서 지냈던 것 같다.
나중에 나도 내 박사 논문에서 확인한 사실이지만
속한 조직에서 적응하면서 지내는 게 성공의 비결 중에 하나였다.
나는 그때 성공하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기로 하자.
그래도 인간관계가 중요한 사람이었기에 친구는 좀 있었다.
낙이 있다면 하나는 같은 과에 유일한 고등학교 때 친구랑 만나는 것이었고
하나는 또 다른 친구의 학과 아이들이랑 어울리는 것이었다.
같은 학과에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던 고등학교 동창은
고등학교때는 각자 친구의 무리들이 있어서 많이 어울려 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 좋게 생각하고 있었던 친구였다.
어쩌면 그 친구가 있었던 것이 가슴 아프게 시작한 학교의 입학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 힘이었다.
지금도 그 친구와는 평생의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
다행히 남편들까지 이야기가 잘 통해서 가끔 같이 만나서 식사도 하고 여행도 한다.
지난 번 포항의 비발디나인에서 2박3일을 보낸 친구중에 하나다.
대학시절의 모든 추억의 대부분이 이 친구와의 일상으로 채워져있다.
그 중 가장 생각나는 것은 부산 해운대 바다다.
우리는 시내에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했는데
항상 같이 만나서 버스를 갈아탔다.
그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혼자서 기다리는 것도 쫌 쪽팔렸고
뭔가 억지로 끌려가는 기분이 항상 들었기 때문에
거기서 친구를 만나서 함께 가면
이러저런 부정적 기분을 조금은 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핸드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만나서 갔는지... 지금 생각하면 경이로운 일이다.
그날도 마침 잘 중간에 버스정류장에서 만났다.
만나자 마자 마음이 통한 건지
가진 돈이 얼마냐 부터 서로 확인했다.
학교는 가기 싫고 돈이 있어야 떙땡이를 칠 수 있으니...
누가 먼저 그걸 물었나? 하고 생각하면 나인 것도 같고...
아무튼 지갑이었는지 주머니였는지...
수중에 얼마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날 다행히 책을 사라고 엄마가 몇 만원을 주셨던 것 같다.
돈이 생각보다 많았다.
당시에는 저작권에 미개한 수준이라 학교앞 복사집에서 대학 교재를 마구 복사해서 팔았다.
마치 서점같았다.
우리는 그날 교재를 서점에서 사지 않고 복사집에서 산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흐흐흐...
끼악~~ 하고 환호성을 한 번 질러주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버스 정류장 대기 줄에서 이탈하였다.
대전역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동안 정말 학교가기 싫을 때
우리는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 부산으로 가는 통일호를 탔다.
부산역에 내려서 다시 해운대를 가는 버스를 탔다
해운대에서 내리라는 안내방송을 해주면 후닥닥 내려서 곧장 바다쪽으로 간다.
해운대 바다 백사장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본다.
이때는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나는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원망을 했던 것 같다.
갈때는 신나지만 끊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면서는 늘 마음이 침울해졌던 것 같다.
그래도 위로를 받고 오는 건 분명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한이 있는 사람이라고 나를 정의하고 있었다.
나의 한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내향형이라서 그런지 가끔 깊은 고독에 빠질 때가 많다.
눈물도 잘 흘렸다.
그리고 한숨을 정말 많이 쉬었다.
(그러고 보니 내 꿈을 찾은 이후부터 한숨이 없어진 것 같다. 와우~)
계집애라서 안됐던 재수
그래서 치욕적이지만 다녔어야 했던 대학..
다시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수치심과 후회들을 바다에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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